“경찰의 뿌리는 1919년 임시정부 김구선생”
지난해 10월 25일 문재인 대통령이 한 경찰의 날 기념식 치사 중 일부이다. 해마다 우리 경찰은 이날을 맞아 시민과 함께하는 경찰을 다짐하는 행사를 열어왔다.
현 경찰의 날은 1945년 해방 후 당시 미군정이 경무국을 창설한 날에서 비롯됐다. 1957년 11월 내무부 훈령에 따라 이 날을 경찰의 날로 지정했고, 1973년 대통령령인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따라 정부 주관 기념일로 확정됐다.
하지만 이러한 경찰의 날을 11월 5일로 변경하자는 목소리는 예전부터 존재해왔다. 1919년 11월 5일에 제정·공포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관제’에 따라 설치된 경무국 창시일을 경찰의 날로 봐야한다는 것이 이유이다.
실제로 경무국에서는 초대 경무국장으로 백범 김구 선생을 초대 경무국장으로 임명하고 당시 백범은 경무국이 임시정부 청사를 경비하고 주요인물들을 경호하게 하였으며 일제의 정탐을 방지하고 밀정을 찾아내는 등 경찰 조직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했다.
헌법 전문에도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법통과 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적혀있다. 경찰의 효시가 미군정기의 과도기적 조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미군정 경무국이 창설된 날을 경찰의 날로 기념하는 것은 헌법과 대한민국의 독립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셈인 것이다.
흔히 우리는 임시정부 경찰 하면 ‘백범 김구’ 선생을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몰랐던, 혹은 잊혀진 인물 중 한명을 소개해 보려고 한다.
1892년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난 나석주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국내에서 상해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조달하는 한편, 결사대를 조직하여 친일파 부호를 사살한 후 1920년 상해로 망명하였다. 그는 1924. 6. 8. 임시정부 경무국 경호국원으로 임명된다.
이후 활동지역을 상해에서 텐진으로 이동, 의열단에 가입하게 된 그는 1926년 유림 독립운동 진영의 거두 김창숙 선생으로부터 조국의 강토와 경제를 착취하는 동양척식회사와 조선은행, 식산은행 등을 폭파하여 일제의 착취로부터 구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국내로 잠입하여 1926. 12. 28. 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졌다.
폭탄은 불발되었으나, 그는 일제경찰과 교전을 벌여 일경 7명에게 사상을 입히고,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투쟁했다.”, “2천만 민중아, 분투하여 쉬지 말라.”는 민족을 향한 외침을 남기고 권총으로 자결하였다.
만약 폭탄이 불발되지 않았다면 어떠했을까? 혹자는 이런 관점에서 그의 의거가 실패였다고 평가하지만, 그의 행동으로 인해 수많은 청년들의 가슴속에 독립운동에 대한 의지가 불타올랐으며 1920년대는 3·1운동 이후 무력과 강압만으로는 우리민족을 지배하기 어렵다고 생각한 일본이 ‘문화통치’라는 이름의 식민정책을 펼치던 시기다.
특히 실질적으로는 친일파를 길러 우리민족을 이간시키던 시기인데 이런 시기에 나석주 의사의 투혼은 일본의 친일유도정책에 큰 저항이 되었음에 분명하다.
백범 김구 선생 뿐만 아니라 이러한 본인을 희생한 민족을 위해 힘쓰던 인물들이 존재하였음을 기억해야 하겠다.
인천연수경찰서 송도국제도시2지구대 순경 송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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