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시립박물관은 ‘이달의 문화재’로 조선시대 재산 중 하나인 노비와 관련된 고문서로 ‘노비매매문기(奴婢賣買文記)’를 선정, 7월 한 달간 전시에 들어간다.
우리나라에서 노비(奴婢)는 고대 사회부터 존재했으며 노비는 가옥·토지와 달리 출산과 사망, 도망 등으로 인해 유동성이 있는 재산으로 취급되어 분쟁의 소지가 많았다.
따라서 개인들 간의 노비매매 후 관청에 입안(立案: 관의 공증)을 받는 것이 엄격히 지켜졌다.
이와 같은 내용은 임진왜란 이후 노비와 관련된 문서의 주류를 차지한다.
일반 노비매매와 달리 조선 후기에는 양인(良人)이 자신의 몸을 팔거나 자식을 파는 자매노비(自賣奴婢)도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이는 극심한 빈곤과 부채를 이기지 못하여 나타난 사회적 현상이다.
전시되는 노비매매문기(奴婢賣買文記)는 1853년(哲宗 4) 김생원(金 生員)댁에서 유생원(兪生員)댁에 비(婢) 월량(月良)과 그 자녀를 30냥에 판다는 내용의 매매 문서다.
전시되는 자매문기(自賣文記)는 1896년(高宗 33) 박종숙(朴宗叔)이 자신을 비롯해 부인과 첩 그리고 두 아들을 노비로 팔고자 작성한 문서다.
전시되는 노비매매문기(奴婢賣買文記)와 자매문기(自賣文記)의 작성방식은 유사하며, 조선시대 공·사문서 서식들을 모아놓은 《유서필지(儒胥必知)》에는 자매문기 형식이 설명돼 있다.
또한 두 문기에서는 양반의 수결대신 양반이 자신의 노비에게 매매를 위임함으로써 노비들의 수촌(手寸: 손가락을 문서에 대고 그리는 서명 방식)과 수장(手掌: 손바닥을 문서에 대고 그리는 서명 방식)을 찾아볼 수 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조선 후기 사회의 노비에 대해 살펴볼 수 있는데, 조선 후기 신분상승 이동 상황 속에서도 노비의 매매는 중요히 이뤄지고 있었으며 1894년 갑오개혁으로 노비제가 폐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극심한 빈곤 속 스스로 노비를 자처하기도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는 매우 의미 있는 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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